변호사 김무한|[email protected]
최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실손보험회사들이 자신들이 보험계약자들(환자들)에게 지급한 보험금이 소위 ‘임의비급여행위’에 관하여 잘못 지급된 것이고, 따라서 의료기관이 이를 보험사에 직접 반환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의료기관들을 상대로 한 채권자대위소송, 또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에 관하여 대위소송의 요건을 흠결하였거나 손해배상책임의 발생요건을 흠결하였다는 취지로 다수의 각하 판결 및 청구기각 판결이 하급심 법원에서 선고되고 있는바, 이에 관하여는 본 법무법인의 2021. 3. 8.자 뉴스레터 [실손보험을 둘러싼 최근의 법적쟁점]에서 이미 자세히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위와 같은 보험사의 소제기에 관하여 다수의 사건에서 최종적으로는 보험사가 패소하는 결론이 도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결과와는 무관하게 소송 수행 과정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부작용이 발생하는 점은 심히 우려할 만한 대목입니다.
우선, 피고가 된 의료기관의 운영자는 법률비용을 지출하여 응소하여야 하고, 문제되는 진료행위가 적법하였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진료행위에 대한 의학적 설명과 보험사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준비하여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각종 의학교과서, 논문 등을 제시하는 등 금전적 측면이나 정신적 측면에서 상당한 손해를 입게 됩니다. 게다가, 법률쟁송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소제기 이전과 동일한 진료행위를 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면 의료기관의 매출에도 악영향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환자들도 적절한 진료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의료기관의 직/간접적인 피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정보침해피해가 환자들에게 발생한다는 점, 심지어 환자 본인들은 그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보험사가 채권자대위소송을 제기한 뒤 의료기관의 진료행위가 부적절하였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개별 환자들의 진료 당시 건강상태와 진료행위의 내용 등을 파악하여 제3의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여야 하며, 그러한 감정절차를 진행하려면 당연히 환자의 진료기록이 필요하므로 보험사는 소제기 후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하여 법원이 의료기관에게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제출할 것을 명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와 같은 절차는 대위소송의 경우 피대위채권의 존재, 즉 환자가 의료기관에 대하여 진료비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대위소송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심리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각하 판결을 하는 경우에는 사실상 진료기록의 제출이 필요 없다고 주장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송요건의 충족 여부와 피대위채권의 존재 여부 등에 관한 법원의 실체판단은 시간 순서에 따라 단계별로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판결 선고시에 한꺼번에 이루어지게 되므로, 소송의 승패결과와는 무관하게 담당 법원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보험사의 문서제출명령 신청이 인용되기도 하고 배척되기도 합니다.
필자도 보험사가 제기한 임의비급여행위 관련 대위소송, 손해배상청구소송, 양수금 청구소송(보험사가 환자로부터 진료비반환청구권을 양도받아 진행하는 경우)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험사 측의 문서제출명령이 인용되는 경우와 배척되는 경우를 모두 경험하고 있으며, 법원에 대하여 수백, 수천명의 환자에 대한 진료기록이 한꺼번에 보험사 측에게 공개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거듭 제기하고 있으나, 재판부에 따라 여전히 문서제출명령을 인용하는 경우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료기관이 문서제출명령을 받으면 대상 문서(환자들의 진료기록)를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진료기록이 어떤 목적으로 어느 범위에서 누구에게 제출되는지에 관하여 정보주체인 환자들에 대한 통지 절차는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료기관은 내원한 환자들로부터 개인정보 제공에 대한 사전 동의를 받아 성명,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등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후 진료과정에서 환자의 건강과 진단, 치료에 관한 민감정보를 생성하여 보관하게 되는바, 개인정보보호법상 개인정보처리자의 지위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의료기관이 수집, 보관, 처리하는 개인정보는 정보주체로부터 별도로 동의를 받지 않는 한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며(개인정보보호법 제18조 제1항), 그 예외 중의 하나에 해당하면 정보주체의 동의 없이도 제3자 제공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되고(같은 조 제2항 각호) 바로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을 받는 경우가 이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이에 관하여 대법원은 대법원 2016. 7. 1. 선고 2014마2239 결정에서,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은 민사소송법 제344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문서제출명령이 있을 경우에는 개인정보보호법 제18조 제2항 제2호의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여 정보주체의 동의 없이도 법원에 대한 개인정보의 제공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한편, 개인정보보호법은 그러한 예외규정에 따라 개인정보처리자가 제3자에게 개인정보를 제공하게 될 경우 정보주체에게 제3자 제공의 목적과 범위, 제3자 제공사실을 통지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보주체인 환자는 그러한 제공의 사실마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물론, 의료기관이 환자로부터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에 관한 동의를 받는 시점에, 위와 같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게 될 경우에는 정보주체에게 그 사실을 통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설정한다면 의료기관이 정보주체에게 통지해주어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으나, 의료기관들이 굳이 그러한 조건을 설정하지 않고 정보제공동의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정보주체에게 진료기록이 법원에 제공된 사실을 알려주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며, 결국 개인정보 중 가장 중요한 민감정보인 개인의 건강정보가 무더기로 법원을 통해 보험사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험사의 입장에서는 각 고객으로부터 보험금 지급청구를 받을 당시에 보험금 지급심사를 위하여 진료기록 등 관련 자료를 제출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으므로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보험금 지급심사 과정에서 제출되는 자료는 정보주체가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제공여부와 제공범위를 임의로 판단하여 제출하는 것으로서 본인이 진료기록 제출을 꺼린다면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고서라도 제출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문서제출명령에 따른 진료기록 제출과 보험금 지급심사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따른 의료기관의 진료기록 제출은 정보주체의 의사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제출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민감정보가 보험사측에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환자들에 대하여 비밀리에 정보침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소송은 특정 의료기관에서 장기간에 걸쳐 행해진 특정 진료행위를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아서, 수년간 동일한 진료를 받은 환자 수는 수백, 수천명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 기각되거나 각하될 것이 뻔한 소송에서 과연 보험사에게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무분별하게 제공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정책적으로는 예기치 않은 개인정보의 제3자 제공이 발생하는 경우 정보주체에 대한 통지의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인정보보호법의 개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보다 앞서 일선 법관들의 경우에는 현재와 같은 안일한 개인정보보호의식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것이며, 문서제출명령을 내리는 과정에서 과연 보험사의 주장에 상당한 근거가 있는지 신중히 검토하고 문서제출명령상 제출대상문서의 범위를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등 환자들의 개인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는지 깊은 고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